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라카낭의 비극 (문단 편집) == 사건 이후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후 2년간 모든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으며, 4년 동안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경기를 치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후배들이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64년 후 다시 자국에서 열린 대회에서]] [[미네이랑의 비극|브라질 축구의 또다른 치욕]]을 만들게 되었다.[* 다만, 1950년 월드컵에서는 모두들 브라질이 우승할 것이라고 여겼던 반면에, 2014년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이 절대적인 강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스쿼드 차이가 있다고 한들, 특히 강팀과 강팀 사이에서 7:1이라는 스코어는 쉽게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인한 브라질 국민의 충격이 마라카낭의 비극보다 컸다고 보기는 힘들다. 브라질 국민들이 당연시 여기던 1950년 월드컵 우승을 놓친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1950년 월드컵은 출전 선수들 거의 모두가 대표팀에서 은퇴하고, 유니폼조차 아예 완전히 바꿔버렸을 정도로 브라질의 충격이 너무나 엄청났다. 전술했듯 경기장에서는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자살]]해버린 사람이 두 명, [[심장마비]]로 죽은 이가 두 명이 나왔을 정도였다.][* 포포투에서는 [[https://www.fourfourtwo.com/features/mineirazo-sad-comedy-not-maracanazo-tragedy-and-luiz-least-brazils-problems|'미네이랑은 슬픈 코미디지만, 마라카낭에서의 비극은 아니다']] 라는 기사에서 마라카낭과 달리 미네이랑에서는 폭동 한 번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인디펜던트에서도 [[https://www.independent.co.uk/sport/football/international/brazil-v-germany-world-cup-2014-comment-why-emotional-scars-of-tuesday-s-shocker-will-not-run-as-9596027.html|어째서 화요일의 상처가 1950년대의 마라카낭보다 깊지 않았나]]라는 기사에서 브라질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울지는 않았다며 마라카낭보다 큰 충격은 아니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브라질이 위대한 축구를 보여주던 1950년대와 다르게 현재의 브라질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들이 언더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충격적인 패배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충격의 수준으로 보면 4강전에서 7점을 실점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여겨진 만큼,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인한 충격도 어마무시하긴 했다. 둘 다 세계를 뒤집어 엎어버렸을 정도이니... 심지어 2014년 월드컵의 로고도 브라질 입장에선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우는 모습으로 보이게 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iariodesevilla.jpg|width=350]]}}}|| ||<:>1950년[* 당시의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은 상의, 하의, 양말 모두 흰색 바탕에 옷깃과 소매 끝이 파란색으로 되어 있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nike-brazil-home-away-world-cup-2018-shirts.jpg|width=350]]}}}|| ||<:>2018년|| 이 비극으로 인해 분노한 [[브라질]] 축구 협회는 그 당시 결승전에서 선수들이 입었던 유니폼들을 모조리 수거해서 '''싸그리 불태워버린''' 후, 유니폼의 색깔을 새로 정했다. [[1914년]] [[브라질]] 축구 협회의 창립 이후 상/하의 모두 흰색 유니폼을 입어왔는데, 이를 버리고 새로 디자인한 유니폼은 노란색 유니폼, '''카나리냐'''다.[* 또 다른 별명으로는 베르데-아마렐라. 우리말로 하면 초록-노랑이다. 이 둘은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명이기도 한데 유니폼 색깔에서 따온 것이다.] 이 유니폼이 세계인들이 흔히 알고 있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현재 유니폼이며 앞으로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1950년 이전과 같은 흰색의 유니폼을 착용하는 꼴을 볼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브라질]]의 축구 팬들은 현재까지도 그 당시 입었던 흰색 유니폼을 [[백기]], 즉, 항복과도 같은 상징이자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이후 흰색 유니폼이 등장한 적이 있긴 있다. 2004년 FIFA 100주년 기념 친선 경기에서 100년 전 유니폼을 재현했을 때 [[브라질]]이 입고 뛴 것. 그리고 경기 결과는 0:0 무승부로 종료되었다.] 브라질 국적의 축구 팬들에게 이 경기 이야기를 하면 표정이 싹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19 코파 아메리카]] 개막전 홈 유니폼을 다시 흰색으로 결정하였다. 골키퍼로 뛰었던 [[모아시르 바르보자 나시멘투]]와 수비진 모두가 이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경기 내용을 보면 그렇게 골문을 두드리고도 골을 뽑아내지 못한 공격진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게 옳았다. 수비진의 잘못은 브라질에 비하면 훨씬 적었던 우루과이의 몇 번의 공격에서 골을 내줬다는 것. 그것 뿐이다.] 특히 바르보자는 더욱 심했는데, 일례로 바르보자가 은퇴 후 길을 가고 있는 도중 한 아이가 바르보자를 보고 엄마에게 누구냐고 묻자 아이 엄마의 대답이 "'''브라질 국민을 절망과 좌절감에 빠뜨린 인물이란다.'''"라고 한 일이 있다.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자 [[만악의 근원]] 취급.[* 하지만 [[1974 FIFA 월드컵 서독|24년 후의 대회]] 때 있었던 일에 비하면 이건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 [[마리우 자갈루|결승전에 못 올라갔다고 사람 이름을 전염병 이름으로 삼아버리는 실로 개막장짓까지 저질렀을 정도다.]]] 그는 2000년에 7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 ''''브라질에서는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범인도 43년 이상 형을 선고받지 않는데 나는 그 경기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만으로 50년을 죄인처럼 지내야만 했다''''는 넋두리를 유언으로 남겼다. 마라카낭 참사가 터지기 전만 해도 [[모아시르 바르보자 나시멘투|바르보자]]는 남미에서 가장 잘 나가던 골키퍼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이 경기로 인해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실제로 그는 은퇴하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국가대표팀]]의 골키퍼 코치 자리에 지원했지만 브라질 축구 협회로부터 패배의 징크스를 가진 선수를 쓸 수는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고, 1993년에는 라디오 중계를 맡으려 했으나 이것도 브라질 축구 협회에서 막았다고 한다. 심지어 바르보자가 [[흑인]]이었다는 것까지 꼬투리를 잡혀서 이후 모든 흑인 골키퍼들에게 '''[[인종차별]]'''이라는 커다란 벽까지 생겼으며, 실제로 [[지다]]의 [[2006 FIFA 월드컵 독일|2006년 독일 월드컵]] 선발출전 전에는 월드컵에서 선발로 출전한 흑인 골키퍼가 단 한 명도 나오지 못했다. 그나마 참화를 비껴 간 선수들도 인생이 편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월드컵 골든 볼러 [[지지뉴]]는 7월 16일, 그러니까 마라카낭의 비극이 발생했던 그 날만 되면 전화선을 끊어 놓았다고 한다. 그것도, 무려 50년 동안이나.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브라질]] 전역에서 "그 때 왜 졌냐?"는 전화가 하루 종일 울려댔기 때문이다.''' [[지지뉴]]는 선수 시절의 수많은 영광보다 그 한 경기의 상처에 평생 가슴아파했다고 한다. 이 경기에서 역전 결승골을 넣은 주인공 [[알시데스 기지아]]는 50년 정도 지나서 [[브라질]]에 여행을 갔다가 정말 기가 막힌 일을 겪었다. 어떻게 봐도 20대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여성 세관원이 기지아를 알아본 것. 기지아가 놀라서 "그건 50년 전의 일이다"라고 답하자 세관원은 '''"브라질의 우리들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오늘 일어난 일인 것처럼 느낀다."'''고 대답했다고... 이 정도라면 정말 무서울 지경이다. 사실 이 정도의 열성이 있었기에 브라질이 세계 축구 최강국의 지위와 월드컵 최다 우승국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원동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만 이게 너무나 과도한 나머지 축구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국민적 정서가 심해졌고, 그래서 과거에 [[스콜라리]] 감독이 "축구 말고 딴 것도 신경 써라! 쫌!"이라고 했을 만큼 집착이 심하다. 이 비극으로부터 63년이 지나서 2013년까지도 생존해 있었던 [[알시데스 기지아]]는 [[2014 브라질 월드컵]] 32강 본선 조추첨을 맡게 되었다. 이제는 마라카낭의 참사를 떨쳐내고 우승을 해낸다는 각오를 다지는 의미에서 초청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의를 불태웠던 자국의 두 번째 월드컵에서 새 역사를 창조할 것이라 기대했는데... 결국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미네이랑의 비극|새로운 '''흑'''역사]]를 창조하고 말았다. 국제적으로는 안 그래도 브라질이 우루과이와 사이가 나쁜 편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 [[우루과이]]에 대한 브라질의 분노와 증오가 증폭되었다. 즉,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던 두 나라가 이 사건으로 인해 그 사이가 더더욱 나빠진 것이다. [[펠레]]는 이 경기의 패배를 라디오로 들으면서 브라질을 반드시 세계 최강의 팀으로 만들겠다고 아버지와 예수상 앞에서 맹세했다. 그리고 1970년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4강 상대가 우루과이로 정해지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고 한다. 나이대가 비슷한 동료들은 물론이고 당시 아기였던 젊은 선수들까지 4강전이 끝날 때까지 틈만 나면 모두 불러 모아서 이 시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왜 반드시 이겨야 하는지를 연설하고 다녔으며, 당시 해설자로 멕시코에 와 있던 지지뉴와 아데미르도 브라질 선수들에게 "우승을 못 해도 좋으니 반드시 우루과이만큼은 꺾어 달라" 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결국 자신이 선두에 나서 우루과이에 승리를 거두면서 어릴 적 아버지와 예수상 앞에서 했던 그 맹세를 지켰다. 그 날 안타깝게 우루과이의 벽에 막혀서 우승이 좌절되었던 브라질은 다음 월드컵인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과 단체 [[현피]](일명, 베른의 전투)를 뜨는 등 개판을 쳐서 우승을 또 다시 놓쳤다. 아니, 아예 준결승도 못갔다.[* 물론 이 대회에서는 브라질보다 헝가리가 강했다. 당시 헝가리는 '''매직 마자르'''라고 불렸다. 이후 헝가리는 준결승에서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으나, [[메스암페타민]]을 맞은 서독에 밀려 준우승을 하고 만다.] 하지만, 그 다음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1958년]]에 이르러서는 [[펠레]]의 활약으로 드디어 첫 우승의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후 브라질은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1970년 멕시코 월드컵]] 4강에서 우루과이를 만나 3:1로 승리하여 이전의 비극을 설욕하고, 우루과이를 4등으로 떨어뜨린 뒤 우승을 차지했다. 우루과이와의 경기 직전에 [[펠레]]가 '''"우승을 못해도 좋으니 우루과이만큼은 꼭 이기자!"'''라고 말하면서 서로 결의를 다진 적도 있었다고 한다. 201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우루과이]]를 꺾으며 마라카낭의 복수를 했다. 지금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남미 지역 예선이나 [[코파 아메리카]] 그리고 월드컵 결선 토너먼트에서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을 만나면 꼭 이를 악문다. 브라질은 이 사건으로 인해서 우루과이와 맞붙게 되면 실력차이의 여부를 떠나서 [[한일전|'''"니들한테만큼은 절대로 질 수 없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준다. 2016년 3월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2018년 러시아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있었던 헤시피 경기장 브라질 vs 우루과이전에서 [[루이스 수아레스]]가 동점골을 넣자 브라질의 관중들은 죽일 듯한 기세로 수아레스에게 달려들기까지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K7rC74MZZQ|#]] 이 사건을 나타내는 [[포르투갈어]]인 마라카나수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마라카낭 스타디움]]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대표팀]] 또는 그 곳을 쓰는 프로 팀인 [[플라멩구]], [[CR 바스쿠 다 가마]], [[플루미넨시]], [[보타포구 FR]] 등의 팀에게 이길 가망이 없이 작살나버린 팀을 조롱하는 뜻의 일종의 [[슬랭]]으로 쓰인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같은 장소에서 치러진 여자축구 4강에서 브라질 여자 축구대표팀이 스웨덴 여자 축구대표팀을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가는 끝에 패배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었다. 그나마 브라질 남자 축구대표팀은 마라카낭에서 열린 4강전에서 온두라스를 6:0으로 KO시키며 결승전에 진출해 첫 올림픽 금메달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비록 U-23이지만, 2년 전 브라질에게 치욕을 안긴 독일과의 빅매치가 성사됐다. 이후 브라질은 독일과 1:1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에서 이기며 브라질의 '''올림픽 축구 역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하게 되었다. 비록 U-23 팀이 나간 관계로 A매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홈에서 개최한 국제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미네이랑의 비극|2년 전의 대패]]와 66년 전의 마라카낭의 비극을 조금이나마 씻어낼 수 있는 의미있는 승리였다. 이 경기에서 결승골을 넣은 [[알시데스 기지아]]는 이 경기에 출전한 22명 가운데 [[마지막 생존자]]로 상술하듯이 2014 브라질 월드컵 조추첨에 나왔다. 그는 브라질이 [[미네이랑의 비극]]을 겪는 걸 다 보고 다음 해인 2015년, 참으로 기묘하게도 바로 이 경기가 열리던 '''7월 16일''' 딱 65년이 지난 그 날[* 즉, 마라카낭의 비극 경기가 열린 날에 태어난 사람이 노인이 되는 날]에 [[심장마비]]로 만 88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2021년 7월 11일, 2021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에서 브라질은 아르헨티나에게 0:1로 석패하며 다시 마라카낭의 비극이 재현되었다.[* 다만 경우에는 아르헨티나를 옹호하는 사람이 더 많았는데 그도 그럴것이 무려 '''[[메시]]의 국가 대표 첫 우승''' 이였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